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공포로 석방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이후 == || [youtube(qrYgqsiB3QU)] || || 1953년 6월 26일 반공포로 석방 직후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이 백만이나 [[이북]]에 있는 이런 상태에서 [[휴전]]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천명했다.[* 결국 [[통일]]도 못 하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으며 중공군이 코앞까지 진주하여 오히려 [[6.25 전쟁|전쟁]] 이전보다 더 악화된 상태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상호방위 조약]]과 같은 [[미국]]의 강력한 보장이 없는 한 어차피 '''또다시 제2의 6.25가 터질 것'''이라고 그는 내다보았고 만약 미국이 이대로 [[한국]]을 방치하여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싸우고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그의 음성과 어조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으려는 시도 자체는 이 사건 이전에도 계속 있었다. 물론 한국측의 요구였을 뿐 미국은 '휴전 이후 긍정적으로 논의해 보자'는 정도였으며 명시적인 확답은 없었다. 미국은 상호방위조약 대신 16개 유엔 참전국들의 명의로 '확대제재선언'을 공포하고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켜 주는 것으로 무마하려고 하였다. 미국 내부 정책은 한국에서 철수하는 쪽에 가까웠고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고 쳐도 한국 정부가 뭔가 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하다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것은 자명했기에 이승만 입장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없이 휴전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휴전 이후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었다. 실제로도 국제 관계에서 구두약속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일례로 미국의 [[헨리 키신저]]는 [[베트남 공화국]]에게 유사시 즉각적인 군사 지원을 구두로 약속하며 파리 평화 회의에 서명하게 했지만 남베트남이 멸망할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미국 내 반전 분위기 때문에 베트남판 상호방위조약 같은 걸 추진했어도 의회에서 통과될 리 없긴 했다.] 멀리 갈 것 없이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의 핵 포기에 따라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가 체결됐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어 문제가 됐고 결국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당시 이승만은 휴전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만약 전쟁이 통일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아무런 안전보장 장치도 없는 상황에서 휴전협정 후 미국이 빠지게 되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자신이 맘먹으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서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미국이 결국 내부 정책을 바꿔 한국을 적극 지키는 쪽으로 선회했고 이를 먼 훗날인 오늘날 돌이켜 보면 도박은 대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도 남한을 포기해 버린다면 UN군의 희생을 헛되게 만드는 격이기 때문에 남한을 애써 지켜 놓고 다시 줘 버리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을 뿐더러 상호방위조약을 맺음으로서 남한을 포기할 의지가 없음을 남한 정부에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외에도 '전작권을 환수하겠다', '휴전협정 이후 한국군을 군사분계선 2km 이남으로의 후퇴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등의 강수를 두며 미국 측의 안전보장을 압박했다. 결국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보름 전인 1953년 7월 12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같은 해 10월 1일에 실제 조약이 맺어졌다. 반공포로 석방 당시 탈주하지 못했거나 남한 잔류(혹은 대만행)가 아닌 중립국행을 희망한 이들은 휴전과 포로 교환이 이루어진 후 비무장지대에 진주한 [[인도군]]에 인계되어 공산군의 설득 작업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설득이라는 게 말이 설득이지 온갖 강압과 협박으로 가득했다. 반공포로가 설득이라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늘어놓는 공산군 군관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을 촬영한 기록 사진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탈주를 시도하다 인도군에게 사살된 사람들도 있었다. 중립을 지켜야 할 인도군들은 반공포로들에게 북한행을 은연중에 강요했고 심지어 위원장조차 포로들에게 북한행을 권유했다. 또 반공포로를 본인 의사에 상관없이 강제 북송한 일까지 있었다. 참고로 이승만 정부는 [[인도]]가 친공적이라고 하여 인도군의 영토 통과를 거부했고 인도군은 별 수 없이 육로로 이동하지 못하고 미군이 제공한 헬기를 타고 여러 차례로 나눠서 비무장지대로 들어가야 했다. 당시 인도는 [[제3세계]]의 일원이긴 했으나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에 우호적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포로에 관련된 협약을 깨 버렸기 때문에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하여 북측에 사로잡힌 [[대한민국 국군|한국군]] 포로들을 더많이 돌려받을 기회를 놓쳤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사건 이전에도 북한은 상습적으로 한국군 포로들을 강제 전향시켜 북한군에 편입시키거나([[https://blog.naver.com/kc6731/120190163871|#]]) 고의적으로 통보 명단에서 누락시키거나 남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포로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범 케이스로 살해해 다른 포로들을 강제로 북한에 눌러 앉히는 등의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었으므로([[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2/07/23/2012072300005.html|#]])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해 생긴 영향은 거의 없었다. 최종적으로 공산측은 UN군 포로 5000여명과 한국군 포로 8800여명을 송환하는 데 그쳤다. 전술한 대로 포로들을 회유·기만·위협하여 반강제적으로 북한 주민으로 편입시켰고 실제로 1956년 내각 43호 결정으로 이것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북한의 위협과 인도의 강요에 반강제로 뜻을 굽히고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소수 있었지만 공산군과 인도군의 회유에도 입장을 번복하지 않은 반공포로들은 다시 UN군에 인계되어 1954년 1월에 공식적으로 석방되었고 북한 출신들은 남한 각지에 정착하였다. 중공군 출신들은 대부분 [[대만]]으로 갔으며[* 본토로 돌아가면 투항군으로 몰릴까봐 대만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일부는 대만에도 가지 않고 [[화교/대한민국|남한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지조를 지키며 본토로 돌아간 중공군들은 영웅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전쟁에서 지고 온 반동이라며 비판을 받았다. 이때 중공군 포로의 70%가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주적인 [[대만]]으로 보내진 것에 격노한 [[마오쩌둥]]이 한국군 포로들을 북한에 억류하도록 지시한 것이 언론에 뒤늦게 알려졌다. ([[http://m.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73627|#]]) 또 1953년 6월 당시 중공군은 중부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금성 돌출부의 장악을 목적으로 대규모 공세를 가하였는데 전선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으나 일부 영토를 점령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만족한 중공군은 이 상태에서 전쟁을 끝내려고 했으나 며칠 후 이승만이 터트린 반공포로 석방 때문에 이 승리가 전부 묻혀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때 풀려난 [[중국인]] 반공포로들이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게 되자[* 사실 이때 한국이 석방시키고자 했던 포로들은 모두 북한인 포로들이었고 중공군 반공포로들은 석방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석방 당시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눈치를 챈 몇몇 중공군 반공포로들이 개별적으로 북한군 반공포로 행렬에 합류하여 탈출했고 북한군 반공포로들이나 한국 군경은 이들이 알아서 끼어들어 탈출하는 것을 딱히 막지는 않았다.] 이에 격분한 마오쩌둥은 석방된 인원들만큼 한국군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고 중국군은 금성 돌출부를 다시 빼앗는 것을 목표로 1953년 7월 13일 [[금성 전투|5개 군, 2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춘계 공세 이후 최대 규모의 대공세를 감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